▲ 칠곡소방서 소방행정과 송영진 소방장작년 여름의 일이었다. 수난구조 신고를 받고 도착한 현장에는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강 한가운데서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대고 있었고, 소방관을 발견한 행인들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간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자동반사처럼 강으로 몸을 던졌고 그 여성을 극적으로 구해냈던 기억이 난다. 각종 미디어나 영화속에서 소방관은 언제나 두려움이 없으며, 지칠줄 모르는 체력과 힘을 바탕으로 불구덩이를 헤치고 위기의 사람들을 가뿐하게 ...
▲ 안태현 칠곡소방서장어느덧, 두장을 남긴 2015년 을미년의 달력을 보며 또 다시 겨울이 오고 한해가 저물어 감을 새삼 느낀다. 칠곡소방서는 올 한해 군민생활안전 예방대책, 재난현장 대응능력 향상, 구조구급서비스 역량강화, 소방활동 기반조성 등 4대 과제를 선정하여 중점 추진해 왔다. 특히 군민생활안전 예방대책에 역점을 두고, 기초생활수급가구 및 오지마을에 소화기・단독경보형감지기 등 기초소방시설을 보급했으며 원터치만으로 과거 병력 정보제공과 응급신고가 가능한 ...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간 치열한 전투로 삼국통일 후 망자의 영혼을 위로코자 영가천도(49재) 극락세계를 추구하는 서방정토인 불교성지가 절실했다. 대부분 사찰의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지만 팔공산 부계(缶溪)의 암벽 석굴은 최초 정토교주 아미타불을 본존불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 협시보살을 봉안한 삼존불 석굴암은 세계적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100년을 앞선 뜻 깊은 호국의 역사적 의미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다부동 호국의 팔공기맥 한티를 넘으면 군위 제2석굴암이며 군사요충지 문경세재를 길목으로 왕의 목을...
일본열도를 통일한 풍신수길은 중국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 반도에 길을 내어달라면서 억지와 교만의 왜구는 20만 대군을 영남 3대로를 따라 삼각 편대를 형성, 동방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을 유린했다. 적 선봉 가또 기요마사는 부산포(浦)에서 영남중로(中路)인 대구 팔거현 소야고개(다부동)를 넘어 경상좌도인 상주와 문경세재를 급습 20일 만에 한양도성이 함락되었다. 신라 백제 고구려는 삼국통일 쟁패전 혈투로 큰 고을 지형 따라 산성이 발달했으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자비의 불국(佛國)을 염원했기에 많은 산...
▲ 매원 곡촌 이수헌 지천면 창평리 녹봉정사 문화제 지정과 함께 복원 연구보고서가 행정당국에 채택 된지 3년이 지났지만 소실된 녹봉정사 폐사지에 스님이 임시 거처하면서 복원사업이 난관에 봉착했다. 절 이전 문제는 국고지원이 안되기에 농봉정사 영모회에서 자체해결 해야 함은 운영기금도 고갈된 영모회 측으론 참으로 대책 없는 허송세월 안타까운 나날이었다. 다행히 칠곡 광주(廣州)이씨 진경(進慶) 문중에서 우선 종중재산을 담보대출 받아 1억원을 절 이전비용으로 희사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
신라시대 팔거리(八居里)지명이 고려 현종9년 팔거현(八莒縣)으로 승격되면서 별칭 칠곡(七谷)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특이함은 거주 거(居)자가 감자 거(莒)로 바뀐 지명이 구전과 문헌에도 없어 알길 없으나, 공자가 사모한 주나라 무왕이 문무(文武)를 겸한 신하를 제후로 승격 할 때 봉토(封土)를 하사한 땅 이름을 거(莒)라하고, 춘추전국시대에 황하(黃河) 중원에서 막강한 제(齊)나라가 합종연횡 연(燕)나라에 70개성을 뺏기고 마지막 요충지 거성(莒城)에서 살아난 길지(吉地)...
낙동강 중류학맥(한려학맥)으로 실학의 태두 정 한강은 성주 무휼구곡을 떠나 칠곡의 노곡방(가실성당 주변)에서 경산지(京山誌)를 집필하다 애석하게 화재를 만나 세월과 나이를 탄식하고 금호강 주변 사수동으로 침거하면서 마지막으로 수제자 이윤우(석담)에게 아들 이도장(낙촌)과 손자 이원정(문익공)이 학문으로 장래가 촉망되니 실학(實學)의 명저인 경산지 집필을 간곡히 부탁했다. 3대에 걸쳐 경산지를 완성한 이원정은 향토실학인 가산산성 중수기(架山山城 重修記)를 다시 편찬한 내용에는 산성 내 칠곡도호부 관아 부속건물과 경상감영 ...
조선시대 축조된 가산산성은 내성 외성 중성의 3중곽(三重郭)형태로 보기 드물게 3대 임금(이조 영조 숙종)100년에 걸쳐 쌓은 내륙의 중요 산성이기에 이조실록은 “漆谷山城 形勝 百培於南漢 嶺南第一關防”으로 즉, 가산산성은 한양의 남한산성보다 백배의 가치를 더한 영남제일 관방의 요새라 예찬하고 임진왜란 당시 소야원(다부동) 고개와 문경새재인 조령고개(박달재)만 잘 지켰으면 한양도성이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라 인조임금은 한탄했다. 가산산성 완성과 함께 칠곡 도호부 승격으로 경상감영 역할까지 맟다 보니 방어와 수비...
단군역사 5천년 국치의 날,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은 백성을 버리고 삭풍의 변방 함경도까지 달아나는 수모를 당하고 병자호란에는 또 다시 조선의 인조임금은 황망히 피신했던 남한산성을 내려와 청나라 왕에게 군신(君臣)의 예로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조선5대 명정승인 이준경(동고)과 이이(율곡)가 국방을 튼튼히 하라는 10만양병설 주장을 무시하고 끈임 없는 당파싸움 궁중사화로 3족을 멸하는 등 피바다의 소모적 쟁패전은 급기야 외침을 불러 오면서 금수강산 초토화에 불안을 느낀 인조는 갑자기 남한산성에 버금하는 가...
한(恨) 오백년 세월 따라 나라를 빼앗긴 일본총독정치의 혹독한 고초와 함께 해방은 되었지만 가난의 멍에는 초근목피(草根木皮) 먹거리용으로 붉은 소나무 껍질을 벗겨 독성을 우려내고자 개천에 핏빛 도랑물이 마을마다 넘쳐나고 감꽃이 떨어지는 춘궁기의 절정에 보릿고개 봄날, 원수 같은 한이 계속되었다. 특히 경상도 내륙은 바다를 멀리하여 생선 해조류가 귀한 곳이라 서민들 허기진 삼복더위에는 가뭄에 콩 나듯 단백질 보충은 오직 개와 닭에 의한 한 보신탕(補身湯)으로, 고유한 된장 김치와 함께 민족 식품의 대명사가 되었다. 오죽...